아크라시아 (Akrasia)
쉽게 풀면
내일이 시험인 줄 알고, 지금 공부하는 편이 낫다고 스스로 결론까지 내려 놓고도 영상 하나만 더 보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일이 원리상 불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정말로 더 좋은 줄 안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으니, 어긋나게 행동했다면 실은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앎에도 층위가 있다고 답했습니다. 원칙은 알고 있지만 그 순간 그 앎을 눈앞의 상황에 갖다 붙이지 못하는 상태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 중요한가
실천적 판단과 실제 행위 사이의 연결 고리가 얼마나 단단한지를 시험하는 사례입니다. 도덕 판단이 그 자체로 동기를 낳는다고 보는 동기 내재주의가 참이라면 아크라시아는 설명하기 곤란해지므로, 메타윤리학에서 도덕 판단의 본성을 가르는 결정적 시험대로 쓰입니다.
논문에서는 이렇게 쓰입니다
옳다고 판단하면 반드시 그렇게 할 동기가 생긴다는 동기 내재주의 주장에 대해, 판단과 행동이 실제로 갈라지는 흔한 경험이 그 주장을 무너뜨리는 반례가 되는지를 따져 본 연구입니다.
몰라서 잘못한 것이 아니라, 알고는 있으나 격정에 눌려 그 앎이 결정적인 순간에 작동하지 못한 상태로 보았다는 독해입니다. 지식의 유무가 아니라 활성화 여부가 관건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것을 고려하면 공부가 낫다는 비교 판단과, 지금 이것을 하겠다는 최종적인 무조건적 의도가 서로 다른 층위에 있기 때문에 어긋날 수 있다고 본 분석입니다.
조금 더 깊게 보면
논의는 소크라테스의 부정에서 시작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층위 구분으로 이어집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보편적 전제는 알고 있지만 눈앞의 사례를 그 전제 아래 놓는 소전제 단계에서 실패한다고 보았습니다. 현대에 와서 데이비슨은 모든 것을 고려할 때라는 상대적 판단과 무조건적인 행위 의도를 구분해, 둘 사이의 간극에서 아크라시아가 생긴다고 분석했습니다. 하위 유형으로는 그 순간의 최선 판단에 어긋나는 좁은 의미의 아크라시아와, 장기 계획을 계속 미루는 시간적 아크라시아가 구분됩니다.
주의할 점
아크라시아는 단순한 충동이나 강박과 다릅니다. 강박은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어서 책임을 묻기 어렵지만, 아크라시아는 행위자가 자유롭게, 게다가 자기 판단에 어긋나게 선택한다는 점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판단 자체를 바꿔 버린 자기 합리화와도 구별해야 합니다.